珍的目光
10월이다. 본문
퇴사한 지 세 달이 훌쩍 흘렀다. 그리고 백수로서 4개월 차를 살게 되겠다.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하면 취준생, 아무것도 안 하면 백수라고 했다. 그러니 나는 백수다. 인정을 하고 나니 한결 편해지냐면 그렇지만도 않다. 내가 나를 '백수'라고 규정하고 났더니 그럼 그 전의 나는 뭐였나 싶은 생각도 드는 등 이래저래 심란하다. 퇴사 전의 내게 뭔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라도 있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거든. 알다가도 모르겠다. 알모경은 귀엽기라도 하지, 나는 그저 한심하고 또 한심하다.
월초다. 9월 중순부터 쓴 교통비는 다음 주 월요일에나 출금되겠다. 교통비 출금 전에는 이렇다할 소비를 못 할 것 같다. 퇴직금 받은 것은 제법 넉넉하지만 다음 직장을 얻을 때까지 퇴직금으로만 살고 싶기 때문이다. 한 달 분의 생활비를 정해 놓고 금액 안에서만 지출하려 노력하고 있다.
벌써 시월이라니, 싶지만 시월 말을 기다리는 중이기도 하다. 월초부터 월말을 세는 것은, 초록색 블라인드 때문이다.
나는 내 방을 화이트 앤 네이비로만 꾸미려고 했다. 원래는 화이트도 생각에 없던 색상이다. 그러나 집을 사고 처음 둘러봤을 때 이미 방이 온통 희었기 때문에, 흰색과 다른 한 가지 색을 더해서 투 톤으로만 구성된 공간을 꾸미리라, 그리 생각했다.
어쩌다 보니 방에 수제가구를 들이게 되어서 공방에다 내가 원하는 색상을 관철시키는 데도 애를 많이 먹었다. 원목의 느낌이 나야 여자 방 같고 그렇다고, 업자가 하는 말이니 들어달라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은 내가 이겼다. 화장대는 들일 생각조차 없었지만 흰색으로 들였고 책상과 책꽂이는 남색으로 도색할 수 있게 되었다.
이사 오기 전부터, 벽지나 블라인드에 거대한 혹등고래의 실사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꿔 왔다. 큰 고래를 두기 뭣하면 깊고 검은 바다의 빛깔이나, 혹은 검은 밤하늘의 색깔이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. 벽지는 모든 방이 흰색의 실크 벽지로 동일하니 어쩔 수 없고 블라인드는 짙은 남색이면 좋겠다, 꼭 남색으로 해 달라고 해야지 했다. 그래서 블라인드 업체에서 시안을 보여줄 때도 남색을 고르고 골랐다. 어떤 색은 너무 탁했고 어떤 색은 너무 밝았다. 남색의 스탠다드라고 할 법한 색을 골랐다. 그리고 나서 며칠을 기다렸는데
초록색이라뇨. 그것도 소나무 밭을 연상케 하는 초록색이었다. 해초 색 같이 조금 점잖은 녹색이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. 남동생 방에 걸릴 것과 바뀌었단다. 남동생 방에 갔더니 내 방에 왔어야 했던 색깔이 걸려 있었다. 이럴 거면 시안은 왜 보여줬고 선택권은 왜 줬는지 모르겠다고 짜증을 뱉었다. 엄마 말씀으로는 설치 기사가 와서 내 방에 초록색을 걸기에, 이 방에 그 색이 아니라고 했더니 기사가 이 방이 초록색이 맞다고 했단다.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셨다는데, 내 방에 남색 들인다 했을 때 만류하셨던 분이 왜 그걸 그런가보다 하셨는지 모르겠다. 경위를 알고 났더니 한결 짜증만 늘게 되었다.
설치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어서 설치 기사를 부르지 않고 우리가 바꿔도 된다고는 하셨는데 그로부터 사나흘이 지나고도 내 방에는 초록색 블라인드가 걸려 있었다. 그리고 나는 며칠을 부루퉁해 있었다. 혹시 쟤(남동생)가 제 방에 걸린 색깔을 맘에 들어하냐고, 그래서 못 바꿔주는 거냐고 툴툴댔더니 돌아온 답은 "스물다섯이나 먹어서 그런 것 가지고 그러느냐."였다.
시정되지 않는 상황과 상태에 결국 포기했다. 인스타에는 지레 포기했다고 썼는데 곱씹어보니 지레 포기했다기 보다는 그냥 이대로 살면 살아지겠지 싶었을 뿐이었다. "내 방이라고 이게 오롯이 내 힘으로 일궈 낸 방도 아니고."하는 마음의 작용이 있었다는 건 비밀.
색깔이 하나 늘었으니, 색깔에 맞는 분위기를 조성해야겠다. 날이 추워지고 창문을 덜 열게 되면 캔들 워머와 향초를 들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초록색과 걸맞게 유칼립투스 향이나 발삼 앤 시더우드 향의 양키캔들을 사야겠다. 마음먹었더니 빨리 갖고 싶다. 월말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.
시월이다. 십 월 말고 시월. 퇴사를 말할 때의 호기롭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. "또 하루 멀어져 간다."의 연속을 살고 있다. 또 얼마 있다가는 십일월이다 같은 소리를 어디든 끄적일 게 분명하다. 어휴.